남서울평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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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의 편지

 
작성일 : 17-11-06
40년만의 만남
 글쓴이 : 강신욱 목사
조회 : 5,282  

지난 봄 대심방을 하다가 어느 권사님으로부터 그동안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무도 가난한 형편에 잘 먹이지도 잘 입히지도 못했지만 착하고 성실하게 생활하고 공부해서 은행까지 취직한 딸이 있었는데
취직한지 얼마되지 않아 20살의 나이에 이름모를 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딸은 그 성실함과 부지런함에 은행의 모든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딸이 예수님을 믿었는데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는 모르고 계셨습니다.
취직시험을 보는 날도 기도했으며, 세상을 떠나는 날도 권사님께 교회에 다니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성장과정에서 계란 하나 먹이지 못해 마음 아팠던 권사님은 너무도 아픈 마음에
딸의 뜻을 따라 파주에 있는 기독교 상조회 묘지에 매장을 하고 매일같이 가다가
어느날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그 후로 40년동안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대뜸 "권사님, 제가 한번 모시고 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일정들과 여름 사역, 교회 행사들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뒤로 미루고 말았습니다.
창립기념집회까지 다 마치고 났을 때 그 권사님께 말씀드렸던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 심방을 같이했던 다른 권사님을 만나 11월 6일 월요일에 시간이 되니 그 때 약속을 지키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권사님은 그 권사님께 말씀을 드렸고, 말씀을 들은 권사님은 딸의 묘를 찾을 생각에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11월 5일 주일예배를 마치고 교인들과 인사할 때 그 권사님이 나오시길래 "권사님, 내일 뵙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권사님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권사님은 설레는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11월 6일 월요일 오전 10시에 저와 제 아내와 그 권사님과 다른 권사님 세 분이 만났습니다.
권사님들은 그 권사님께 질문해서 그 기독교 상조회 묘지가 어디인지 알아 놓고
미리 연락까지 하셔서 40년만에 묘지를 찾을 때 필요한 정보를 챙겼습니다.
감사하게도 동행하지는 못했지만 또 다른 권사님은 그 딸의 묘에 가져다 놓을 꽃바구니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1시간 30분이 조금 못되어 파주시 탄현면 축현리 890번지 기독교상조회에 도착했습니다.
많은 묘지들이 있어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40년 동안 찾아오지 않았는데 묘가 보존되어 있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 권사님은 방향을 기억하고 저기 어디쯤 묘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상조회 사무실로 들어가서 이런 고인의 묘를 찾는다고 이름을 이야기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고인이 없다고 하며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여기라고 기억하고 계신다고 하고 매장년도를 확인하는데 비슷한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원분의 표정이 조금 난감해지며 저에게 관계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라고 했습니다.
직원분은 어머니 되시는 분이 반드시 들으셔야 되는 설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동안의 관리비가 체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연락처를 찾고 연락을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아 자기들도 난감했다고 합니다.
상조회 사무실에는 들르지 않고 묘지만 찾아 왔다가 가는 사람들도 있어서 비석에 체납고지서를 붙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40년간 찾아오지 않았으니 그럴만도 했습니다.

직원분은 역정을 내거나 불손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갑자기 거액의 체납액을 제시하게 되어 미안하게 되었다며
그 내역을 우리가 불쾌하거나 놀라지 않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액수가 커서 한번에 다 납부하지 않고 나누어 내도 된다고 안내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일부를 납부하고 나머지는 나누어 내겠다고 했습니다.

직원은 묘지를 안내해 주겠다며 앞장섰습니다.
제가 운전하는 차 옆자리에 앉아서 공동묘지의 좁은 길을 안내했습니다.
어느 정도 가서는 바로 저 묘라며 한 분묘를 가리키고는 사무실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그 분묘를 보고 적잖이 놀랬습니다.
방문하기 전에 우선 40년간 찾아오지 않았는데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러면 그 권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묘를 그냥 두었더라도 관리비를 35년간 체납한 묘라고 손보지 않아 흉하게 방치되어 있으면 어쩌나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벌초라도 하려고 교회 경비반장님께 말씀드려 낫과 전지가위를 챙겨 갔습니다.
그런데 깨끗하게 벌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비석에는 분명 그 따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체납딱지가 조그맣게 붙여져 있었지만 따님의 이름을 알아 보는 데에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권사님은 주저 앉아 그저 개 띠라고만 기억하고 있는 딸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엄마가 너무 오래만에 와서 미안하다며 엉엉 소리내어 우셨습니다.
정확히 몇 년도에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그냥 개 띠라고만 알고 있던 딸이 77년도에 사망했습니다.
1958년 개 띠이며 77년도에 20살 꽃다운 나이로 사망한 것입니다.
살아있었다면 올해 60이 되었을 딸입니다.
가난해서 좋은 병원에 가보지도 못하고, 병명도 모른 채 숨진 딸을 가슴에 묻었던 엄마가
40년만에 딸의 무덤에서 그 무덤에 난 풀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동행하셨던 권사님들도, 제 아내도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40년만에 찾아온 무덤 앞에서 여인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도 차오르는 눈물을 막기 어려웠지만 애써 참으며 주변에 키가 크게 자란 풀들을 전지가위로 잘랐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40년이 되도록 분묘를 그대로 보존해 준, 뿐만 아니라 벌초까지 해 준 상조회가 너무 고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체납된 관리비 이야기를 그렇게 부드럽게 분납방법까지 알려준 그 직원분(김태경 부장)이 너무 고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이 기적이요, 하나님의 은혜다 싶었습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40년만에 딸의 무덤을 찾아간 11월 6일이 바로 40년전 그 딸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던 것입니다.
그 권사님은 처음에 딸의 사망시기를 여름쯤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상조회에 와서 서류를 보니 11월 7일에 매장을 했습니다.
가난한 형편에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의 장례를 정식으로 치르지 못하고 바로 그 다음날 매장을 했던 것입니다.
다만 당시 권사님은 신앙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딸이 기독교식으로 해달라는 그 부탁을 기억하고
그저 기독교 상조회의 묘지에 매장을 하고 어려운 형편에 비석을 세웠던 것입니다.
저는 제가 비는 일정을 고르다가 보니 월요일밖에 없고, 더 추워지기 전에 가야 되겠다 싶어 11월 6일을 골랐을 뿐인데
그 권사님에게는 또 하나의 감격스러운 기적이 되었습니다.
 
그 권사님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부터는 두 다리를 쭉 뻗고 편하게 잘 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꼭 그렇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잠을 설치며 11월 6일을 기다리셨다는 그 권사님은 제게 이 은혜를 어떻게 갚냐고 하셨지만
저는 제가 오히려 착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몇 주 전부터 시간을 빼고, 상조회를 찾고, 주소를 찾고, 그 권사님을 모시고 교회당으로 와서 먼 길을 동행해 주신 세 권사님들은
제 마음에 그 권사님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주신 하나님의 천사들처럼,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세 여인들처럼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40년간 그 묘를 지켜주시고 11월 6일의 기적을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파주의 야산에 갔는데도 하나도 춥지 않고 오히려 따뜻했으며, 햇살도 참 좋았고, 단풍도 참 아름다왔습니다.
우리 하나님, 정말 멋진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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